평균 26초 이상 읽지 않는 현실에서, 조심스레 긴 메일을 씁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기 전까지 몸을 잊고 산다. 이는 자연스럽기보다 사회적인 현상이다.
거스를 수 없는 고통이나 제약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몸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
이 사회는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하게끔 가르치길래 이렇게 된 걸까.
작년 가을, '오늘의교육'이라는 교육 잡지에 <느끼는 몸의 교육학>이라는 글을 쓰면서 적었던 구절입니다. 수 백 시간을 끙끙 앓다가 서툴게 주절주절 풀고 나면 마감일을 2주는 넘기고 맙니다. 그러나 사람의 친절과 기다림, 배려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아요. 편집자님의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든 글이 나오곤 합니다.
그렇게 원고를 넘기고 나면, 한 동안 쓴 글을 못 쳐다 봅니다. 절제하고 정제하지 못한 서툰 표현들이 괴로워서요.
그래도 훌륭한 독자분들이 형태를 너머 글에 담긴 고민의 세월과 진심의 깊이를 읽어주셔서, 다시 목소리를 낼 용기를 내 봅니다.
'체력이 안 좋아서 그래'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회자되는 말이다.
체력은 사전적으로 신체적 힘과 능력을 말하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체력'은 사뭇 다르다. 대개 어떤 일을 멈추지 않고 잘 수행하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체력이 좋다'는 것은 '잘 버틴다'는 말이다. 몸이 안 좋아도 잘 느끼지 못한 채 엄청난 투지를 발휘하는 병든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다. 사실 한국에서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들의 몸이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비상식적인 노동 강도, 착취를 용이케 하는 위계 문화와 같은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반증하고 있다.
감각이 둔하면 혹은 무뎌지면 삶은 조금 더 쉽게 견딜 수 있지만, 자신의 몸 내부에서 보내는 신호나 벌어지는 일을 잘 인지하지 못해 오히려 삶의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하게 살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존재적 위기가 오기도 하고 - 보통은 중년에 온다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생애주기 언제든 찾아온다 - 해소되지 못한 채 몸에 꾹꾹 눌러두던 감정들이 통증이나 질병으로 발현되어 뒤늦게 관심을 요청하기도 한다.
우리 몸도 꽤나 배려심과 인내심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외면당한 시간을 참다 참다, 한계를 다하면 절박하게 관심을 요청하지요. 그 표현 방식이 우리를 참 괴롭고 비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온갖 감정과 감각(고통)의 파도를 타고 나면, 결국은 짠함이 남습니다.
그 짠내 나는 일상을 잠시 벗어나 여기저기 뭉친 몸도 따뜻하게 풀어주고 삶의 서핑 스킬도 점검해 볼까요. 요즘 더욱이 삶의 바다 아래 가라앉는 느낌이라면 더욱이 환영합니다.
5월 14일-15일 <건강하게 일하는 몸의 기술> 세미나로 초대합니다.